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라틴아메리카 근현대사 (문단 편집) === 과테말라 혁명과 과테말라 내전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과테말라 내전)] 1944년 6월, 과테말라를 철권통치하던 호르헤 우비코는 6월 총파업으로 사임한다. 히지만 우비코는 엉뚱하게 군부에게 권력을 이양했고, 과테말라는 군사독재에 시달리게 되던 중, 알다나 산도발, 프란시스코 아라나, 하코보 아르벤스라는 젊은 장교에 의해 쿠데타가 일어나 군부의 중심인 폰세 바이데스가 사임하는데 이를 과테말라 혁명이라고 부른다. 쿠데타 세력은 빠르게 민정에 권력을 이양해 공정한 선거로 후안 호세 아레발로가 당선되었고 아레발로는 급진적이지는 않았지만 천천히 개혁을 진행했다. 이후 프란시스코 아라나를 비롯해 다수의 쿠데타 시도가 있었으나 하코보 아르벤스가 저지했고, 하코보 아르벤스는 다음 선거에서 민간인으로써 대선태 출마해 당선되었다. 1951년 3월 과테말라의 대통령이 된 아르벤스는 취임사에서 다음과 같은 연설을 했다. > 우리 과테말라가 가진 모든 부를 다 합쳐도, 대부분의 평범한 국민의 생명과 자유, 품위와 건강 그리고 행복만큼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그 부를 우리는 잘 분배해야 합니다. 덜 가진 사람들은 더 혜택을 보고, 더 가진 사람들도 혜택을 누리되 덜한 정도로 하자는 것이지요. 무슨 방도가 있겠습니까? 우리 국민이 처한 가난과 열악한 건강 상태, 교육의 결핍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 >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 p.434~435 아래는 비자이 프라샤드의 저서 <워싱턴 불렛>에 나오는 내용이다. > 1951년, 하코보 아르벤스는 민주적 사명을 띠고 가난한 과테말라의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는 농민 계급이 토지를 소유해 스스로를 해방시키기를 바랐다. 아르벤스는 부유한 집안에서 자랐고, 이후 군에 입대한 사람이었다. 군에서 장교로 재직하는 동안 그는 미국의 지원을 받은 독재자 호르헤 우비코가 농민을 탄압하고, 그들을 과테말라 유일의 최대 지주이자 미국인이 소유한 거대 기업인 유나이티드프루트를 위해 일하게 하는 모습을 목격했다. 아르벤스는 공산주의 지도자인 호세 마누엘 포르투니와 여성주의자와 사회주의자였던 배우자 마리아 빌라노바에게 영향을 받았다. 1950년 대선에서 승리했을 때, 그는 국민을 위해 토지를 이용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61명이 정원인 의회에 공산주의자는 4명에 불과했고. 아르벤스 내각에 공산주의자는 단 1명도 없었다. 현실은 이랬지만, 공산주의 세력이 개혁에 끼친 영향력은 과장되었다. >---- > 비자이 프라샤드, 심태은, 워싱턴 불렛, 두번째 테제, 2022 p.85 이처럼 아르벤스의 개혁은 온건했다. 비록 아르벤스는 아레발로의 정책을 이었지만, 토지개혁은 좀 더 급진적인 모습을 보였다. 아르벤스는 900호 법령을 발표해 272헥타르보다 큰 비경작지, 그리고 91헥타르보다 크고 272헥타르보다 작은 토지 중 비경작지가 1/3 이상인 토지를 유상으로 몰수하기로 했다. CIA의 1952년도 비망록에는 과테말라의 상황이 "사회 개혁과 민족주의적 정책을 호전적으로 지지하는 공산주의자들의 영향" 때문에 "미국의 이해와 상반되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노엄 촘스키, 김보경, 미국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 한울, 1996 p.81] 아르벤스는 대규모 토지개혁 정책을 예고하고, 그 첫 단계로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 소유 토지 947㎢(2억8,646만 평)에 대한 국유화에 착수했다. 이 회사가 소유한 전체 토지 2,226㎢는 과테말라 전체 경작지의 약 1/5이었는데 '''이 중 85%가 [[휴경지|놀리는 땅]]이었다.''' 과테말라의 토지 문제는 심각했다. 아르벤스가 집권하기 1년 전인 1950년을 기준으로 보자면, 당시 과테말라의 전체 토지의 72% 이상이 약 2%의 소유주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1952년 6월 토지개혁법이 의회에서 통과되었고, 정부는 분배 가능한 토지를 대상으로 농님들이 직접 땅을 요구할 수 있도록 지역농민위원회를 결성하도록 했다. 개혁이 실시되는 18개월 동안 1,500여개가 만들어졌으며 당시 혜택을 본 농민의 수는 약 14만 명이었다. 1950년대 초 과테말라의 전체 인구가 약 300만 정도인 점을 감안하면, 토지개혁의 성과는 단기간에 이루어진 셈이고, 적잖은 농민들이 토지분배의 혜택을 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개혁을 통해 사회의 가장 최하층을 이루는 무토지 농민이나 강제노동의 주요 대상이었던 원주민들이 새로운 정치적 주체로서 등장하는 계기도 마련했다.[* 정이나, 「과테말라 36년 내전의 계급적 성격에 대한 고찰: 토지개혁을 중심으로」, 『중남미연구』 3, 한국외국어대학교 중남미연구소, 2015, p.143~144.] 물론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도 그러지는 않고 싶었으나 [[파나마병]]이 바나나밭을 초토화시키고 있었고, 이를 막을 능력이나 새로운 품종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르벤스 대통령은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에 보상금으로 60만 달러를 주겠다고 제안했다. 이 회사가 앞서 소득신고서에 기재한 토지 가격을 기초로 산정한 금액이었다. 신고 토지 가격이 탈세를 위해 엄청나게 후려친 가격임은 말할 것도 없다.[* 올리버 스톤 피터 커즈닉, 이광일,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 들녘, 2015 p.435][* 댄 쾨펠, 김세진, [[http://m.yes24.com/Goods/Detail/4240288|바나나: 세계를 바꾼 과일의 운명]] 이마고] 미국 입장에서야 이것도 정말 많이 봐준것이지만 '''[[파나마병]]으로 인한 바나나 공급 감소로 위기를 겪던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는''' 가만히 눈 뜨고 토지를 몰수당하는 것 그 자체가 있을 수 없었고, 곧 에드워드 버네이즈를 이용해 '''미국 본국에 찌르고 CIA를 이용해 1954년 아르벤스를 축출하는 쿠데타를 일으킨다.'''[* 아르벤스가 대선에서 승리했을 당시, 61명이 정원인 의회에 공산주의자는 4명에 불과했고, 아르벤스 내각에는 공산주의자가 단 1명도 없었다. 쉽게 말해, 미국의 CIA는 아르벤스 정부의 영향력을 반공이라는 구실 아래 과장한 것이다.(비자이 프라샤드, 심태은, 워싱턴 불렛, 두번째 테제, 2022 p.85)] 사실 미국이 주도한 과테말라의 쿠데타는 1951년 해리 트루먼 대통령이 ‘피비 포춘PB Fortune’이라는 비밀공작을 승인하면서 개시된 셈이었다. 이에 따라 진보적인 아르벤스 정부의 정복공작은 시작되었다. 1951년 6월 미국의 <뉴욕 타임스>는 "과테말라라는 암 덩어리" 운운하며 "아르벤스 대령이 대통령이 된 지 2달밖에 안된 시점에 이미 과테말라 정치에 대한 깊은 실망과 환멸"이 넘쳐나고 있다고 주장했을 정도다.[* 올리버 스톤 피터 커즈닉, 이광일,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 들녘, 2015 p.435] 1951년 과테말라시 주재 미국 대사관의 1등 서기관이 워싱턴으로 보낸 서한의 내용을 보자. > '''과테말라 정부가 과테말라 기업에게 강경하게 나가는 것이야 우리가 상관할 바 아니지만, 미국 기업을 상대로 강경하게 나온다면 그때는 우리가 관여해야 한다.''' >---- > 비자이 프라샤드, 심태은, 워싱턴 불렛, 두번째 테제, 2022 p.86 미국의 정치공작은 참으로 집요했다. 유나이티드 프루트는 과테말라가 공산주의의 위협을 받는다는 기사를 활용해 의회에 로비하는 데 당시 돈으로 50만 달러를 썼고, 이를 통해 미국 의회와 여론을 자신들 편으로 만들었다. 미국 정부가 과테말라에 무기 공급을 중단하자 아르벤스 정부는 동구권 국가인 체코로 부터 무기를 사들였는데, 미국은 서구 언론사에 이러한 무기 거래의 영향을 과장해서 전달했다. 제10회 미주대륙회의에 참석하고자 베네수엘라 카라카스에 갔던 존 포스터 덜레스는 과테말라를 강조하며 "공산주의 세력의 침입"을 규탄한다는 내용의 결의안을 추진했으며, 결과적으로 과테말라만 결의안에 반대표를 던지도록 정치공작을 했다. 심지어 NBC 방송 중계는 '''과테말라의 붉은 정권'''이라고 공공연하게 떠들어 댔다. 아르벤스 정부에 대한 미국의 공작은 이러한 여론 및 정치공작에 바탕을 둔 것이다.[* 비자이 프라샤드, 심태은, 워싱턴 불렛, 두번째 테제, 2022 p.89] 아래는 인도 역사학자인 비자이 프라샤드가 쓴 <워싱턴 불렛>에서 인용한 내용이다. > 유나이티드프루트는 최고의 PR 전문가인 에드워드 버네이스를 고용해 미국 의회에 공산주의 음모론을 퍼트리도록 했다. 그는 "'''공산주의 선전물'''에서 유나이티드프루트라는 이름이 나올 때마다 이를 '''미국'''으로 대체해서 읽어도 무방할 것이다."라고 썼다. 버네이스는 유나이티드프루트와 미국이 유의어이며, 그렇기에 유나이티드프루트를 공격하는 것은 미국을 향한 공격으로 봐야 한다는 논리를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것이 핵심이라고 보았다. 버네이스는 <시카고트리뷴>, <뉴스위크>, <뉴욕타임스>, <타임> 등의 기자들에게 유나이티드푸르트의 자금을 뿌려 과테말라의 공산주의자에 대해 보도하도록 했다. <뉴욕타임스>에 게재된 1951년 7월 14일자 무기명 보도에서, 기사 작성자는 '''고산지대에 있는 고대 마을에 사는, 글도 모르고 주류 세계의 흐름과 동떨어진 마야인이 공산주의가 또 다른 형태의 노예제임을 본능적으로 깨닫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고 썼다. 이 기자는 고산지대에 사는 그 누구도 직접 취재하지 않았고, 누군가의 말을 인용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유나이티드프루트가 준 보도자료를 갖다 썼다. >----- > 워싱턴 불렛 p.88~89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는 아르벤스가 공산주의자라고 주장했지만 사실은 전혀 아니었다. 아르벤스는 좌파이긴 했지만, 공산주의와는 거리를 둔 상태였다. 그가 소속되어 있었던 혁명행동당(Partido Acción Revolucionaria , PAR)과, 과테말라 혁명단((Partido de la Revolución Guatemalteca, PRG))에는 공산주의자가 빠져 있었는데, 가장 큰 이유는 아르벤스의 개혁이 공산당의 마음에 들 만큼 급진적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미국의 CIA는 과테말라의 우익 군부 잔당들과 접촉하여 아르벤스 정부의 전복을 위한 구체적인 작전계획을 수립했다. 아르벤스가 1953년 8월 12일 2차 토지 수용을 단행한 후, CIA 작전조정위원회(Operation Coordinationg Board)는 아르벤스를 최우선 순위로 놓고 작전을 진행할 것을 명령했다. CIA는 300만 달러를 투입해 카스티요 아르마스[* 니카라과의 독재자 소모사의 지지를 받았던 인물이다.]의 용병단을 훈련시키고 전체 군 수뇌부가 아르마스를 지지하도록 만들려고 시도했다.[* 비자이 프라샤드, 심태은, 워싱턴 불렛, 두번째 테제, 2022 p.92] 더 나아가 CIA는 1953년 9월 11일, 대과테말라 하이브리드 전쟁 보고서를 작성했는데, 이 보고서의 핵심 내용은 '''경제적 압박'''이었다. 보고서는 '''과테말라 정부의 경제가 압박에 취약한 점을 고려해 석유 공급, 해운업, 주요 수출입 물품 등 가능한 부문을 겨냥한 비밀 경제 전쟁 방식이 적용될 것'''이라고 써 있는데, 아래에 후술된 칠레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미국의 닉슨 정부가 아옌데 정부에게 가했던 살인적인 경제제재 계획 및 국가 뒤흔들기 방식은 과테말라에서 선행학습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54년 6월 CIA에서 훈련받은 용병들이 온두라스와 니카라과 소재 기지를 떠나 과테말라로 침투했고, 미국은 항공지원을 해가며 이들을 도왔으며, 아르벤스 정권을 전복하고자 했다. 6월 27일 아르벤스는 저항해봐야 소용없다는 판단을 내리고 사퇴했다. 쿠데타로 인해 지도자 자리에서 사임한 아르벤스는 고별 라디오 연설에서 '''지금 우리가 당하고 있는 일은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가 미국 고위층과 결탁해 벌인 일'''이며, 앞으로 20년간 피로 얼룩진 파시스트 독재가 계속될 것이라고 경고했는데, 파시스트라는 부분만 제외하면 아르벤스의 발언은 대체로 사실이었다. 과테말라에서의 체제 전복이 성공한 이후 미국의 덜레스 국무장관은 미국 대중에게 연설하는 자리에서 '[[여러분 이거 다 거짓말인 거 아시죠|소련 공산주의에 대한 민주주의의 승리]]'라는 말이 안되는 발언을 하며 쿠데타를 극찬했다.[* 올리버 스톤 피터 커즈닉, 이광일,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 들녘, 2015 p.440~441][* 덜레스의 이러한 발언에 대해 한 영국 관리는 '''덜레스의 거짓말에 구역질이 난다'''면서 덜레스의 연설은 '''소련 외무장관 몰로토프가 체코슬로바키아에 대해, 또는 히틀러가 오스트리아에 대해 했던 말을 연상시키는 대목이 많다'''고 지적했을 정도다.] 쿠데타 이후에는 친미정부가 개혁을 깡그리 되돌렸지만 1960년부터 쿠바와 니카라과의 지원을 받은 좌파 반군들이 속속들이 일어나기 시작해, 1996년까지 자그마치 36년간이나 [[과테말라 내전|내전]]이 지속되었다. 과테말라 정부 공식기관인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Histrorical Charification Commision)’는 1999년에 발표한 보고서에서 과테말라 정부군이 다수의 마야 원주민 마을에서 저지른 626건의 대량학살사건을 상세히 설명하고, 이를 “제노사이드”로 규정했는데, 이 보고서에 따르면 CIA를 비롯한 미국 정부기관들이 정부군의 학살행위를 직간접적으로 지원했으며, 학살행위로 인한 전체 사망자는 20만 명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올리버 스톤 피터 커즈닉, 이광일,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I, 들녘, 2015 p.168~169][* 촘스키와 허만에 따르면 1978년부터 1985년까지 과테말라에서 우익들에 의해 살해된 민간인 숫자만 최소 10만 명이 넘는다고 추정했다.] 미국의 후원으로 대통령직에 오른 아르마스 대령은 곧바로 반공법을 제정하고 '공산주의자'는 6개월까지 재판 없이 임의 구속이 가능하도록 했는데, 실제 공산당원 수가 4,000명이었던 데 반해 정부가 공산주의자로 낙인찍고 체포한 사람은 72,000명에 달했다. 1981년 국제사면위원회의 다음과 같은 지적을 보자. > 희생자들의 시체는 계곡에 쌓이거나 길가에 방치되거나 한꺼번에 매장되었다. 수천 명이 고문으로 고통당했고 사망자 대부분이 목이 졸리거나, 비닐봉지를 뒤집어 쓴 채로 질식하거나 머리에 총탄을 맞고 죽었다. >---- > 노엄 촘스키 에드워드 허만, 정경옥, 여론조작, 에코리브르, 2006 p.168 물론 미국 정부는 당시 과테말라의 친미적인 정권이 미국이 기본적인 인간의 가치를 옹호하는 국가라고 믿었지만, 문제는 1980년대 레이건 행정부만 보더라도 실상은 딴판이었다. 당시 뉴욕 타임스의 칼럼니스트 앤서니 루이스는 칼럼에서 소위 반공이라는 명분 아래 미국이 라틴 아메리카의 독재자들을 지원하고 있다고 주장했으며, 과테말라의 경우 '''정부군이 헬기를 타고 농촌 마을에 들이닥쳐 벌초용 칼로 여성들을 난도질하고 오두막을 불태우고 주민들의 눈알을 뽑아내는 등의 만행을 저질렀다는 보도'''를 상세히 소개했다. 루이스는 당시 과테말라 친미 정부의 게릴라 소탕작전을 '''제노사이드에 가까운 대량학살'''로 규정했다. 뻔뻔스럽게도 미국은 이후 자신들이 세운 친미 정부 하에서 자행된 학살을 돕고 방조했지만, 자신들의 관여한 행위를 부정했었다. 아래는 <워싱턴 불렛>에 나오는 내용이다. > 아르벤스가 타도되고 공산주의자들이 살해당했을 때 미국은 관련 책임을 부인했다. 그러나 내심으로는 전율했다. CIA 국장 앨런 덜레스는 주 온두라스 미국 대사 화이팅 윌로어에게 쿠데타(실제로 덜레스는 혁명이라고 불렀다.) 전문을 보냈다. 나중에 월로어는 덜레스가 보낸 전문이 '''사실상 나 아니었으면 혁명은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내용이었다고 말했다. 미국 정부는 1966년 제정된 정보공개법에 따른 언론인의 정보 공개 요청을 거부하거나 무시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활동을 은폐해 왔다. 소련이 붕괴하기 전까지 그 어떠한 문서도 공개되지 않았다. 이러한 문서 공개 거부는 과테말라군이 반대 세력에게 자행한 학살을 미국이 조장하고 관여하며 공모한 것과 함께 이루어졌다. 미국 국무부의 바이론 바키는 1968년 3월 내부 비망록에 CIA가 과테말라에서 용인하고 자행한 폭력이 '''라틴 아메리카 내에서 우리의 이미지, 우리가 대의명분으로 내세우는 것의 신뢰도 측면에서 지대한 문제를''' 가져다주었다고 적었다. >----- > 워싱턴 불렛 p.117~118 당시 과테말라에서 아르벤스의 개혁정치를 지켜보던 한 인물이 있었다. 그가 바로 그 유명한 [[체 게바라]]였다. 과테말라에 있던 체게바라는 쿠데타 군대가 학살극을 벌이자 아르헨티나 대사관으로 피신했다. 이를 지켜본 체 게바라는 무장투쟁의 길로 바꾸게 된다. 이렇게 토지를 지키기 위해 기만을 일삼고 선거를 통한 정권을 탈취한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는 이후 웃기게도 본국의 반독점법에 걸려 중남미의 철도망과 과테말라의 토지 일부를 매각해야만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